세대를 가로지르는 반역의 정신 COOL - 딕파운드 외

Books, and I think 2012. 5. 7. 23:06



요즘 쿨하다 쿨가이 라는 말을 자주 쓰긴하지만 쿨함 이란게 진정 어떤식으로 쓰는지 어디서 왔는지 를 알고 싶어서 그냥 봤다 (제목하고 내용이 재밌을줄 알고 봤는데 별로....)

조금 어려운 내용이였다 '쿨' 함이란 그냥 한권의 논문을 보는거 같았다 밑에는 설명

 

착한 사람은 싫다. 쿨하게 살고 싶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최고의 찬사는 '쿨하다'가 아닐까? 
쿨한 사람은 어떤 일이든 어려움 없이 산뜻하게 처리하고, 실속 있게 처신하면서도 속물 티를 내지 않고, 문명의 이기를 능란하게 다루면서도 초연해 보이고, 쾌락을 좇으면서도 자기절제에 철저하고, 냉소적이면서도 타인을 배려할 줄 알고, 일상에 찌들지 않고 게임을 하듯 유연하게 삶을 꾸려나간다. 
1980년대 말에 대학을 다닌 사람이라면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 왕가위의 <아비정전>의 정서에 심취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재즈 선율의 BGM을 타고 흐르는 냉소와 허무주의의 내밀한 감수성과 미의식에 마음이 흔들렸을 수도 있다. 이 사소한 사건이야말로 한국 사회에 개인주의의 새로운 양식인 쿨 포즈의 싹을 틔운 계기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로부터 10년 남짓. 끈끈한 집단주의 문화는 점차 퇴조하고 있다. 질척이지 않고 산뜻하고 세련된 감정 스타일인 '쿨'은 현대인의 이상적 기질이자 행동 양식으로, 사회적 소통의 형식으로 새로이 떠오르고 있다. 전통적 가족제도가 무너지고 직업적 안정성이 위협받는 현실의 삶에서, 대중매체가 쏟아내는 현란한 욕망의 기표 속을 떠다니는 현대인에게 쿨 포즈는 불안과 무력감, 패배의식을 이겨내는 실존적 선택일지도 모른다. 
자생문화가 아닌 탓에 한국 사회에서 표피적으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지구적 규모로 재편되는 후기자본주의 조류 속에서 바야흐로 '쿨'은 세계를 지배하는 문화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쿨'이라는 감정 스타일을 사회심리학, 정신분석학, 역사학, 텍스트 비평을 통해 입체적으로 분석한 이 책은 '쿨'을 문화적 범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쿨이란 무엇인가? 
'쿨'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문화적 결과물이 아니라 그에 반응하는 개인적 태도로서 '쿨'은 대단히 다중적이기 때문이다. 쿨의 의미성을 고찰하려면 특정 사건이 문화 전반(언어, 춤,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책이나 잡지, 음악, 의상, 회화, 자동차, 컴퓨터, 모터사이클 등)에 어떻게 파급되어 나타나는지 살펴보는 소박한 접근법이 유용할 수도 있다. 
한때 쿨 패션의 상징이던 리바이스 청바지의 쿨함은 푸른 천으로 재단된 청바지의 내적 성질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탄광 노동자들이 작업복으로 즐겨 입던 데님바지는 그 저항적인 하위문화의 맥락에서 쿨했다. 하지만 이제 리바이스 청바지는 더 이상 쿨하지 않다. 리바이스 청바지로 쿨함을 과시하던 세대는 오늘날 주류사회를 이끄는 기성세대가 되었고, 그들의 자녀인 젊은 세대는 주류문화에 반항할 새로운 쿨 패션과 아이콘을 찾아 나섰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의 이삼십대 역시 나이를 먹을 것이고, 새로운 세대가 등장해 또 다른 쿨 트렌드를 만들어낼 것이다. 청년세대 하위문화의 합성물인 쿨 포즈는 시대에 부합하는 스타일을 찾아내어 끊임없이 변주되는 본성을 지녔다. 
그러나 이들 쿨 트렌드의 밑바닥을 흐르는 개성은 변하지 않는다. 나르시시즘, 역설적 초연함, 쾌락주의가 그것이다. 스스로를 과도하게 찬양하는 나르시시즘과 위험한 상황에서 권태로움을 가장하거나 모욕적인 상황에서 유쾌함을 연출하는 등의 역설적 초연함은 억압적 상황에서 개인의 감성과 정체성을 보호하는 심리적 방어기제로 작용한다. 또 세속적이고 도발적인 쾌락주의는 마약이든 알코올이든 섹스든 예술이든 가리지 않고 탐닉하며 삶의 순간순간을 최고로 하이하게 즐기려는 쿨의 절대적 가치이다. 

쿨의 원형 ,지역적 스펙트럼 
쿨은 서로 다른 사회와 역사적 시기에 출현한 태도이자 개성 양식으로, 문화적 의미로 전환되고 추적 가능한 일관성을 띤 역사적 신드롬이다. 20세기 중반 미국적 문화현상으로 떠오르기 전에도 쿨 포즈는 여러 사회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이는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궁정귀족들이 선망한 냉담함의 미학 '스프레차투라'나 영국 귀족 사회의 전통적 행동 양식,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의 조류 속에서도 감지된다. 
하지만 현대적 감정 스타일로서의 '쿨'은 고대 아프리카 문명에 젖줄을 대고 있다. 쿨의 원형은 서아프리카 요루바 부족의 종교윤리인 '이투투'에서 발견된다. 종교예식에서 물이나 푸른색과 연관되는 이 덕목은 분쟁을 해소하는 냉철한 능력이며 친화력 있고 관대하고 우아한 품성이다. 요루바 사회에서는 전사들의 공격성을 누그러뜨리고 부족 내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이투투'를 종교적 규율로 삼았다. 
이 아프리카의 '쿨'은 노예선을 타고 신세계로 옮겨왔다. 흑인 노예들은 고된 육체노동과 가혹한 모욕을 견뎌내는 심리적 태도로 쿨 포즈를 연출했다. 분노와 위반의 감정을 감추는 이 역설적 익살의 가면은 억압에 대한 소극적 저항을 담고 있었다. 이후에도 쿨 포즈는 흑인들 사이에서 인종차별과 부조리한 박해로부터 개인적 정체성을 지키는 심리적 방어기제로서 유효했다. 이 흑인 정서는 블루스, 비밥, 재즈, 힙합 음악의 형태를 빌어 정체된 백인 사회를 휘저으며 대중문화 속으로 스며들었다. 

쿨 속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회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세속적이고 염세적인 가치관을 퍼뜨리며 서양정신사의 지형을 바꾸어놓았다. 규율대로 살아가는 산업사회의 프로테스탄트 직업윤리를 부정하며 후기산업사회의 개인적 삶의 양식으로서 '쿨'이 전면에 나선 것이다. 
1950년대에 등장한 비트족(힙스터)은 빨리 살고 일찍 죽는다는 하드보일드한 슬로건을 내걸고 술과 마약과 범죄와 동양사상에 탐닉하며 주류사회에 맞서 급진적인 도전을 실행했다. 이들은 육체적?정신적 안정을 거부하고 사회와 단절된 채 연고 없이 생존하려 했으며, 자아에 대한 반역적 명령을 품고 미지의 여행을 떠나려 했다. 비트족이 틀을 잡아놓은 쿨 포즈를 물려받은 것은 히피였다. 1960년대 반문화운동의 주역인 히피들은 비트족과 마찬가지로 반체제적이고 탈조직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이고 지독한 개인주의적 성향을 띠면서도, 자유분방한 이미지로 사회를 변혁하고 대중적인 영향력을 떨치고자 열망했다. 1970년대 들어 미국 주류사회가 전복되거나 몰락하지 않을 것임이 확연해지면서 이상주의에 대한 환멸은 심오한 허무주의로 번져나갔다. 사람들은 세상을 쓸어버릴 복수의 환타지를 꿈꾸며 폭력에 빠져들었다. 사이키델릭하고 과격하고 시끄럽고 잔인하고 민주적인 펑크음악에 경도된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펑크족은 성향에 있어서 비트족에 가깝지만, 역설적 반항을 실행했다는 점에서 히피 세대와 구조적 동일성을 드러냈다. 
1980년대에 집권한 레이건과 대처의 우익 보수파 정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쿨의 대중성을 강화시켰다. 이들의 경제 정책은 디오니소스적 쾌락주의와 경쟁과 탐욕을 정당화했다. 성공한 여피들은 세련되게 차려입고 거침없이 개인적 쾌락을 추구했다. 이어 미디어와 광고업계, 프로스포츠, 연예산업의 현란한 이미지 조작에 길들여진 1990년대 힙합 세대들이 그 바통을 넘겨받았다. 
서로 배치되는 듯이 보이는 이들 시대적 트렌드는 문화적 맥락에서 조망하면 '쿨'의 대중화 과정이라는 연속성을 띤다. 언제나 쿨의 관심사는 적절한 외양과 행동 코드를 찾아내어 철저히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쿨과 대중문화, 미디어/광고 산업 
쿨은 할리우드 영화와 록 음악에 의해 흡수되고 유포되었고 할 수 있다. 영화배우와 뮤지션 그리고 1980년대 이래 강렬한 몸의 이미지로 원형 쿨 포즈를 연출하며 연예산업 영역으로 편입한 프로스포츠 스타들은 다채로운 쿨 포즈와 패션을 선보이며 대중문화를 선도했다. 
험프리 보가트와 로렌 바콜, 마를레네 디트리히, 제임스 딘, 마릴린 먼로, 말론 브랜도, 로버트 미첨, 폴 뉴먼, 데니스 호퍼, 존 트라볼타, 샤론 스톤... 쿨의 정의를 대중적으로 일깨운 배우들이다. 단 세 편의 영화를 찍고 교통사고로 사망한 제임스 딘은 최초로 쿨의 순교자 반열에 올랐다. 젊은 세대는 제임스 딘을 가족과 학교, 권위, 노동 규율이라는 숨 막히는 억압기제에 맞선 이유 있는 반항아로 기억한다. 또한 엘비스 프레슬리는 쿨이 대중을 움직이는 무서운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뮤지션이다. 중년에 접어들어 비만한 몸에 낙하산복 같은 우스꽝스런 코스튬을 걸치고 다녔어도 쿨 파워는 여전히 그의 몸속에 접합되어 있었다. 
쿨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워홀이다. 아방가르드를 가장해 상업적으로 성공한 워홀은 어떤 인공물을 생산하든 중요한 것은 내적인 쿨 포즈를 외적인 기호로 표현하는 것임을 제대로 인식했다. 부르주아 본격예술이 통속적 목적에 전복된 셈이다. 본격예술에 대한 일말의 존경심마저 던져버림으로써 워홀은 대중문화에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엘비스 프레슬리가 착수한 과업을 완성했다. 
어느 시기건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은 불변의 진리이다. 쿨은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 윤리로 자리잡았고, 대중문화 변천 사이클의 메인 플레이어로 등장한 미디어와 광고산업은 쿨이라는 문화 코드를 영리하게 이용했다. 대중매체들은 뉴스 취재는 뒷전으로 밀어놓고 쿨의 아이콘인 연예계 스타의 뒤를 캐고 다니기에 바쁘고, 광고업계는 스타 시스템을 이용해 공격적 마케팅을 펴고 있다. 광고업계나 마케팅 담당자들은 젊은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쿨이라는 문화 코드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미디어와 광고산업은 쿨과 함께 성장했고, 쿨의 법칙을 아는 이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흑인 노예들의 심리적 방어기제이던 쿨 포즈는 청년 하위문화를 가로지르는 메타코드로 설정되고,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윤리가 되었다. 이제 현대인은 대중문화 속에 끊임없이 콜라주되는 쿨 이미지를 소비함으로써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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